“케이 너 진짜 괜찮겠어?” “…응 괜찮으니까 빨리 가.” 평소 나가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오미는 침대 앞에서 떠날 생각을 안 했다. 진짜 괜찮다니까.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빼꼼히 이불 밖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비실비실 이모한테 다 일러야겠네. 그녀가 내 이마를 짚었다. 쿠로오씨 곧 올 거니까 약 먹고 한숨 자. 나는 고개만 끄덕이며 다시 이불 속...
파리에 도착한 지 셋째 날 일요일.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설마 하고 챙기지 않았던 우산을 챙길 걸 후회하고 있는데 쿠로오씨가 캐리어에서 우산을 꺼내왔다. “우산 챙겨 왔어요?” “응. 혹시 몰라서” 날은 흐리고 비는 그칠 기미가 안 보였다. 나오미에게 같이 나가자고 했지만 과제가 많다며 거절했다. 너 비 와서 귀찮아서 그렇지. 소파베드에서 일어날 생각을 ...
고등학교 3학년 나는 진학반에 들었다. 학기 초 나를 부른 선생님은 부 활동을 계속할 것인지 물어보시면서 원활한 수험생활을 위해 배구를 그만두는 것을 권유하셨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이렇게 배구 바보같이 구는 거,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바보는 옮는다더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하도 주위가 다 바보들뿐이라 사회적 동물인 내가 그 정도 옮는 건 어쩔 ...
커피를 마셔도 졸릴 만큼 피곤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지루하다. 나는 계속 입구를 주시했다. 마침내 기다리던 사촌이 왔다.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들었다. 그녀가 인사하며 계단을 올랐다. “너 안 추워?” “추워.” 생각보다 얇은 옷차림에 안 춥냐고 묻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패션 하는 애는 뭐가 좀 다른가 봐. 옆에 나를 따라 일어선...
도쿄로 대학을 가겠다 마음먹은 날로부터 며칠 뒤 쿠로오씨는 신난 목소리로 전화를 걸더니 주전 선발 소식을 알렸다. 덤덤히 축하를 건네는 내게 그는 좀 더 신날 수 없냐고 했지만 100% 일어나리라 예상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에 놀란 척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 네 덕분이야.’ 간지럽게 웃은 그는 내 덕분이라는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문득 그의 ...
이륙한 지 두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앞치마 차림의 승무원들이 보였다. 벌써 밥먹을 시간이 된 건지 잠시 잠에 들었던 사람들이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나는 멍하니 여전히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는 영화를 바라보다 작은 움직임조차 없는 쿠로오씨를 힐끔거렸다. 죽은 건 아니지? 이틀 전 갑작스레 파리에 간다는 내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던 그는 심각한 얼굴로 자기도 ...
고등학교 3학년 겨울이 지나고 치른 대입고사에서 무난하게 상위권 성적을 받았다. 배구를 꽤나 좋아하지만 나는 운동을 업으로 삼고 싶진 않았다. 굳이 업이 아니더라도 배구를 계속할 방법이야 많으니까. 나는 미술사학과를 선택했다. 공교롭게도 쿠로오씨와 같은 대학이었는데 그와 같은 대학교에 다니고 싶어서 지원한 것이 아니라(쿠로오씨에게도 누차 말하지만), 미술사...
펼쳐진 캐리어에 잡히는 옷가지를 대충 집어넣었다. 날씨가 얼마나 춥지? 핸드폰을 켜 파리 날씨를 검색했다. 나오는 기온을 봐도 어느 정도의 추위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몰라. 추우면 가서 사 입으면 돼. 겨울 여행은 이래서 짜증 난다. 몇 개 넣지도 않은 옷가지의 부피로 캐리어가 벌써 반 이상은 찼다. 나는 또 무얼 챙겨야 할까 고민하다가 시계를 슬쩍 봤다....
2세트가 끝난 3분의 휴식시간, 나는 자리에 앉아서 거친 숨을 토해내며 물을 들이켰다. 세트 스코어 2-0으로 한 세트만 더 따내면 승리였다. 손가락에 휘감긴 테이프를 꾹꾹 누르며 감독님을 쳐다봤다. “오늘 블로킹 타이밍 좋아.”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편의 세터와 레프트의 속공 공격이 꽤나 성가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까...
도쿄에서 미야기까지는 넉넉잡아 3시간이 걸린다. 학교 정문 앞에 세워져 있는 대형 버스에 대학교 로고가 크게 박혀 있었다. 맨 앞에 써 붙인 ‘배구부’ 글자에 간지러움이 발목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비록 배구부 전용 버스는 아니었지만 나름 운동부로 유명한 학교답게 구비하고 있는 버스는 크고 좋았다. 몇 년 안으로 반드시 전용 버스를 타고 ...
「이제 잘거니까 라인 보내지 마세요.」 11:23 pm 읽음 읽음 11:23 pm 「벌써?」 읽음 11:23 pm 「자기 전에 잠깐 통화하면 안돼?」 읽음 11:24 pm 「응?」 읽음 11:24 pm 「츳키 자?」 읽음 표시가 연이어 뜨는데도 츠키시마는 답장이 없었다. 벌써 잠들었나? 핸드폰 쥔 채로 자는 거야 지금? 상상하니 그 모습이 귀여워 웃고 있는...
대학 생활은 별거 없었다. 정말, 젠체하는 게 아니라 딱히 특별하다고 느낄만한 게 전혀 없었다. 더 커다란 체육관에서 좀 더 선명한 코트 위에 올라 더 강한 선수들과 연습하고 경기하는 게 다였다. 내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았던 생활의 연속인데도 나는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굴었다. 들어도 무슨 소린지 알 길이 없는 교양 수업이 끝나면 나는 서둘러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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